베를린
ㅇ 그간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있었다. 물론 '벽차고 날아올라 이단옆차기'처럼 비현실적인 액션장면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액션을 연출하는 감독이기때문에 믿고 보는 편이었다.
ㅇ 그런데 그런 류승완 감독(나에게는 액션영화의 감독으로만 인식되던)이 '부당거래'라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 전형적인 액션물이 아닌 이 영화를 훌륭하게 연출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단순한 줄거리의 치고박는 '액션'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나, 검사와 경찰간의 미묘한 권력다툼까지 어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유치뽕짝 시나리오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 세련되고, 깔끔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시나리오작업을 어떻게 한거지? 학원이라도 다닌건가? 라고 생각하고 찾아보았었는데, 시나리오는 류승완 감독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연출능력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나리오를 훌륭하게 연출하는 것이 감독의 진정한 능력이잖는가. 아무튼 그래서 그의 시나리오 집필능력은 아직까지 나에게는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ㅇ 이번 영화 '베를린'은 제작할때부터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정우와 류승범, 거기에 한석규, 전지현까지 한데 모으기도 어려운 거물들의 캐스팅에 성공하고, 베를린 로케까지. 제대로 돈 좀 써서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것 같았다. 그런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류승완 감독이 직접썼다고 했다. 첩보액션물 시나리오는 정말 어려운 분야 아니었나? 류승완 감독이 그런 어려운 작업에 성공했다니,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시나리오를 쓰고, 류승완감독이 연출만 했다면 걱정이 안됐을지도 모른다.
ㅇ 드디어 개봉한 베를린을 보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작품이 나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나온적이 있었던가? 물론 다양한 헐리웃 액션영화의 주요장면들과 분위기를 짜깁기 한 듯,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의 연속이었지만, 원래 충무로 키드라고 자처하던 감독 본인이 아니던가. 괜찮다. 본 시리즈 수준의 영화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비슷하게만 만들어도 좋겠다는 기대였는데, 정말 비슷했다. 전체적으로 본 시리즈와 비슷했고, 마지막 갈대밭씬은 최근 007영화의 엔딩 클라이막스와 비슷했다.(사실 본 아이덴티티에서도 갈대밭 씬이 나왔다.-_-) 하지만 괜찮다. 비슷한거지, 따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본 시리즈 이후의 액션영화중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그만큼 본 시리즈가 액션영화에 남긴 충격은 컸다. 그래서 '베를린'이 장르가 비슷한 본 시리즈와 흡사한 느낌이 드는건 사실 어쩔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화가 쨘 나와줘야, 또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이 나오고, 투자가 활발해지고, 언젠간 우리도 본 시리즈와 같은 수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것 아닌가.
ㅇ 그래서 정말 만족스럽게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이상한 글을 읽게 되었다. 영화 '베를린'이 표절논란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 찾아보시면 정리된 글 들 있습니다.) 이게 뭔소린가. 이 좋은 영화에 표절논란이라니. ㅠㅠ 표절의 대상이 된 작품은 '차일드 44'라는 소설이었다. 주요장면들이 닮았다고 여기저기서 이야기들을 하는 모양이던데(심지어 해당 소설의 번역가도 의혹을 제기했다.) 류승완 감독도 예전 인터뷰에서 '차일드 44라는 소설을 인상깊게 읽었다'라고 이야기까지 해 놓은 전적이 있어서 의혹은 더욱더 증폭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도저히 궁금한 건 못참으니까, 바로 소설 '차일드 44'를 샀다.ㅋㅋㅋ 일단 여기까지 글을 쓰고! 며칠 후에 소설을 다 읽고 진짜 비슷한지 다시 좀 써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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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다시 써본다.
일단, 장르 자체는 다르다. '베를린'이 첩보액션스릴러 뭐 이정도라면, '차일드44'는 범죄소설이다. 연쇄살인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인데, 영화 베를린과는 장르 자체가 달라버리다보니, 솔직히 표절이냐 여부를 따지자면 아니라는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흐름이 비슷하고, 전개가 흡사하다는 식의 느낌이 팍 들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만은 않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는, '많이 참고'한 수준인데,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라던지, 인물관계, 몇몇 장면의 세부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류승완 감독이 일부러 차용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나 묘사가 너무 눈에 띤다.(심지어 대사까지) 뭐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 다른 인터넷 글들을 찾아보면 잘 나와있기도 하니,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 소설을 읽고 가져다 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체로 놓고 봤을땐 다르지만, 부분 부분의 전개나 묘사, 디테일이 똑같다. 내가 표절의 정확한 기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이게 표절인지 아닌지 딱 구분해서 말 할 수는 없지만, '따라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멋진 장면이나 묘사를 보면 창작자의 입장에서 안좋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 부분에서 감독이 적당한 타협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오마쥬? 오마쥬라면 해당 작품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져다 썼다고 해야하는데 그건 절대 아닐것 같고ㅋ 그냥 대충 살짝 가져다 썼다고 해야하나.ㅋㅋ
뭐 법적으로 문제가 될지 안될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욕심이 생겨서 가져다 쓴 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단, 이런식으로 문제가 되면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상황에서 불편한 부분은 감독과 제작사인 CJ의 태도이다. 감독은 이 표절의혹제기를 단순한 마녀사냥이라고 했고, CJ는 출판사의 책을 팔아먹기 위한 의도일뿐이라고 했다. 그냥 솔직하게 "조금 차용했다." 라고 하거나, 그 말까지 하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한다면, "영향을 받은건 사실이다."정도까지만 해명했어도, 괜찮았을텐데, 그들의 태도는 기존의 팬인 나조차도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류승완의 해명인터뷰
(문제가 되는 장면이나, 대사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배급사 CJ의 어이없는 멘트 또한 해당 기사에 들어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6&oid=006&aid=0000061464
정말 작은 사소한 설정이나 묘사를 인용하기 위해 판권을 사는 다른 해외 제작사와 감독들은 돈이 남아돌아서 그런 것은 아닐텐데, 이번 '베를린'표절 논란은 그런 면에서 조금 씁쓸하긴 하다. 이미 류승완 감독과 CJ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에 올바른 사과를 하는 것은 힘들것 같고,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아무일 없는 듯 은근슬쩍 조용히 넘어가는지 지켜봐야겠다. (막강한 CJ의 파워를 생각하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전작 '부당거래'에서 권력형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을 마음껏 비웃었던 류승완 감독이기에 대기업과 손잡고 남의 작품을 차용하고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은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차일드44'는 현재 리들리 스콧이 제작자로 판권을 구매해 영화화 예정에 있다. 영화 '베를린'과의 논란을 떠나서 원작 소설이 너무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영화도 기대가 된다. 게다가 리들리 스콧 제작이니 말 안해도 영화는 괜찮게 나올 것 같다. 해당영화를 기대해 봐야겠다.